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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任演(임연) 2016. 4. 25. 17:28

해미읍성(2016,4,19)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講武)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 보게 되었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한 대상지로

정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축성을 완료하게 된다.

그후 해미에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여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의 역활이 끝나게 된다. 이후 충청도 5진영중의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邑成)의

역활을 하게 된다.

조선후기 정약용(1762~1836)은 당시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에 열흘간

귀양을 왔다. 1790년대 정조때 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와 1868년 오베르트

도굴사건(독일의 상인이던 오베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현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검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 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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