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우남 이승만박사 47주기 추모식’을 19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가졌다.
▲ ‘우남 이승만박사 47주기 추모식’이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주관으로 19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konas.net | |
이날 추모식은 강창희 국회의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정근모 前 과학기술처장관, 정부주요인사, 기념사업회원, 유족, 학생 및 시민 등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기념사업회장의 인사말, 국회의장 · 국가보훈처장 · 前 과학기술처장관의 추모사에 이어 추모공연, 분향 및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됐다.
강창희 국회의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승만 박사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해방의 초석을 다져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 이념적 혼돈의 시기에는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정치이념이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는 것을 선도적으로 제시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던 시기인 제헌국회 국회의장 시절에는 자유민주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고, 초대 대통령으로서는 가난한 변방의 작은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내정(內政)과 외치(外治)에 혼신을 바쳐왔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승만 박사를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부터, 해방직후의 혼돈기, 건국직후의 국가형성기까지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 근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밝혔다.
▲ 축사하는 강창희 국회의장. ⓒkonas.net | |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할 때 구국의 길잡이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극심한 좌우의 이념대립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기초를 굳건히 다져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이어 광복 후 우리나라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한 선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왔는데 그러나 독립과 건국, 호국, 산업화와 민주화, 선진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수난과 발전의 역사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과거 수많은 선열들과 호국영령들이 대한민국을 찾고 지켜냈듯이, 이제는 우리가 한·미동맹을 튼튼히 해 대한민국을 지킬 차례”라며 선열들이 민족을 위해 불철주야 매진한 것처럼 자유민주주의 터전 위에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도록 젊은 세대들과 함께 힘써 나갈 것을 강조했다.
이기수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비록 4.19에 의해 하야했지만 항상 우리 청년들을 향해 “장하도다! 우리 청년들!” 이라며 그들의 기상과 용기를 높이 평가 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검증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온갖 거짓 소문과 악담들이 사실인 양, 이 대통령 서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사항들을 마음아파 했다.
이 회장은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 고착화, 친미, 독재 등 온갖 난폭한 언어들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실로 답답할 수밖에 없으신 분”이라며 그러나 이제는 이 대통령이 서거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만큼 ‘분단’이 아닌 ‘건국’을 말해야 하고 ‘친일파’ 등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평화선’을 선포, 일본을 압박하여 오늘날의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친미’ 주의자가 아닌 ‘용미’ 주의자였던 대통령이었음을 알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의 ‘독재’를 말하기 전에 건국 후 2년도 안돼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이 합작하여 일으킨 6.25전쟁의 참화부터 말해야 한다”며 “전쟁은 민방공 훈련이 아닌 먼저 보고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제로섬 게임’임을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분향하는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konas.net | |
우남 이승만박사(1875.3.26〜1965.7.19)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으며, 1896년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여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 계속 활동하였다.
1898년 광무황제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전단을 배포하였다가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며,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독립정신’에는 국제간의 외교와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닦았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서는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단결을 위해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